Release
<돌창고 들판 소식>
미숫가루의 재료가 될 찹쌀을 수확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농사인데다 무농약으로 지어 잘 자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농사가 아주 잘 됐다며 특등급의 찹쌀이라고 칭찬을 해주실 때도 긴가민가 했는데, 밥을 지어 직접 먹어보니 과연 맛이 좋습니다. 돌창고는 본래 마을의 곡물 보관창고였습니다. 건조를 마친 찹쌀을 포대에 넣어 돌창고 안에 보관하고 있는데, 그 장면을 보면 ‘순정’, ‘원형’, ‘회귀’ 같은 우리가 좋아하는 단어가 마음속에 차오릅니다.
찹쌀을 거두어들인 돌창고 들판에는 지금 시금치 씨앗이 뿌려져 있습니다. 겨우내 길러낼 시금치는 조만간 이파리 페스토가 되어 많은 분들을 만나겠습니다.
<프로젝트 소식>
돌창고 스튜디오가 이순신 바다공원 브랜드 디자인 작업을 마쳤습니다. 원래는 이순신 순국공원이라고 불렸던 곳입니다. 임진왜란을 끝낸 전쟁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일어난 곳이 남해 관음포 앞바다인데, 바로 그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이순신 바다공원이 있습니다. 낡거나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종합안내도와 방향 안내 사이니지 디자인을 개선하여 방문객 동선을 설계했고, 공원 로고를 새롭게 만들어 방문객들이 공원 관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는 ‘순국의 바다’라는 이름의 자연스러운 전망대 겸 포토존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의 바다를 관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철요리 인터뷰>
남해군 설천면 정경희 어머님(1949년생) 인터뷰
파래무침
겨울에 굴 딸 때 파래가 나요. 파랜데 그 뭐라하노 매생이? 매싱이보다는 약간 굵고, 그 하동 요짝에 나는 그 신갱이(파래의 일종)라 하지? 그것보다는 약간 가는, 그 중간쯤 되는 파래가 이 앞바다에서만 나요. 딱 여기서만 나는데 정말 맛있어요. 그러니 그기 12월 말에서 1월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나요. 그 파래를 씻어서 젓국에다가 무쳐 먹거든요. 다른 거 하나도 안 넣고 젓국만 넣어요. 그래가 무쳐 먹고 그걸 젓국에 무친 그대로 딱 한 끼 반찬 낼 만큼씩 해가꼬 냉동실에 얼려 놨다가 여름에 먹으면 기가 차더라고. 여름에 먹으면 그게 약간 삭아 가지고, 삭았다는 건 부드러워졌단 말이겠죠? 그래가꼬 굉장히 맛있어요.
<신간 소개>
문화공간 돌창고의 최승용 대표가 신간 『사소한 이름 – 지역 문화 인프라 구축 이야기』를 펴냅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고자 하는 한 젊은 기획자가 ‘어떻게 하면 지역을 매력적으로 오래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온 과정을 담았습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며 겪은 이야기, 함께한 작가 및 작업자들과의 에피소드로부터 파생된 단상을 적었고 돌창고가 수행한 공간디자인 및 리브랜딩 프로젝트 보고서를 일부 정리하여 실었습니다.
문화공간 돌창고가 문을 연 지 7년. 그동안 돌창고가 겪어온 변화와 성장, 깊은 고민을 통해 깨달은 지역의 방향성을 포함해 남해를 껴안은 한 젊은이의 머릿속과 마음을 훔쳐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후지요시다 통신> / 돌창고 비주얼디렉터 스기하라 유타

후지요시다의 상징적인 실크 직물 “가이기 KAIKI”가 일본 전역에서 유명해진 것은 에도시대입니다. 당시에는 서민들이 고급 기모노를 입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이 있었고, 기모노를 염색하는 색까지 에도 막부가 지정했습니다. 무사와 귀족, 서민 등으로 신분이 나뉘어진 시대였던 만큼 사치는 자신의 신분을 일탈하는 것으로 여겨져 사회질서에 대한 중대한 반항이자 범죄로 여겼던 것이지요. 에도 서민들은 기모노 겉감은 수수한 색을 사용하고 안감으로만 멋을 부렸습니다. 이때 에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바로 KAIKI였습니다.
KAIKI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극세하고 고밀도로 짜인 원단이 엄청난 광택을 뿜어낸다는 것, 고밀도로 짜인 원단 덕분에 회화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KAIKI에 그려진 무늬에는 다양한 의미와 지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구와 벚꽃잎이 그려진 옷감은 ‘말이 지나가면 벚꽃이 하늘을 날린다’라는 당시 인기 있던 노래 가사에서 따온 것인데, 거기에는 남녀관계에 대한 은유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입은 기모노의 안감을 서로 보여주며 교양 수준을 어필하거나 그림놀이를 했습니다.
KAIKI는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소설 속에도 등장할 만큼 높은 문화적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지나면서 일본 사람들은 기모노를 입지 않게 되었고, 쇼와 시대에 접어들어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직물 산업은 단숨에 쇠퇴하게 됩니다. 전쟁 후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에도 패션업계가 KAIKI를 원하는 일은 없었고 KAIKI를 만드는 기술은 물론, 모두의 기억 속에서도 이 상징적인 직물은 사라져갔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KAIKI의 기술이 지금 후지요시다 산지에 남긴 것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